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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속의 충효

예산속의 충효

잃어버린 망국의 한이 서린 임존성의 회한과 더불어 예산은 역사 위에 점철된 무수한 사건과 흥망 속에서 나라의 발전에 기여한 충신과 가정 및 사회의 귀감이 되는 효자가 줄을 이어 이 고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자암(自庵) 김구(金絿),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포저(浦渚) 조익(趙翌), 자암(自庵) 김구(金絿), 선석(仙石) 신계영(辛啓榮), 옥동(玉洞) 이윤(李淪), 동암(東巖) 박두세(朴斗世),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석문(石門) 윤봉오(尹鳳五), 혜환재, 이용휴(李用休), 정산(貞産) 이병휴(李秉休),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 목재(木齋) 이삼황(李森煥), 근제(謹濟) 성수묵(成遂默)등, 이들은 한 시대를 금긋는 뚜렷한 업적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우리의 정신 속에 살아 남아 오래 기억될 우리 고장의 인물들입니다.

김정희의 추사체, 자암(自庵)의 인수체(仁壽體)는 글씨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았으며 그 정통을 이어받아 우리 예산은 문향(文鄕)과 묵향(墨鄕)의 고장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종왕(鐘王)의 서체(書體)를 배워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자암(自庵)은 10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 예산에 돌아오니 부모가 모두 돌아 가셨습니다. 그는 부모의 산소에 가서 통곡하다가 기절까지 했고 조석으로 산소에서 통곡했기 때문에 잔디풀이 말라 죽었습니다.

그도 이로 인하여 병을 얻어 세상을 등졌으며 그가 남긴 글씨 뿐만 아니라 효(孝) 정신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한말에는 일제에 침탈되어 가는 국운을 구하고자 한말 의병의 봉화를 올렸던 우리 예산인이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과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선생을 들 수 있습니다.

매헌 윤봉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은 나라를 잃었던 한 많은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던 역사에 빛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월진회(月進會)를 통한 농촌 운동과 신체단련, 문맹퇴치 운동 등은 매헌의 선각자다운 기개가 있음이요, 자기 한 몸으로써 온 국민을 깨우쳐 나라 잃은 서러움을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의 발판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생명을 초개같이 던져 나라를 다시 새워야 한다는 일념(一念)이 일제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 샹하이 홍커우(上海 虹口) 공원에서 터진 폭탄소리는 한국의 독립을 알리는 소리였고, 동양평화의 방해자이며 침략군국주의의 원흉인 일본을 응징하는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연(一然) 신현상(申鉉商), 일우 김한종(金漢鐘)의사, 천도교령(天道敎領) 춘암(春庵) 박인호 선생 등, 우리고장의 많은 독립투사들이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워온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고장의 숭고한 맥으로 이어 내려 오고 있습니다. 또한 불교선종(佛敎禪宗)의 중흥조(中興祖) 경허(鏡虛) 송성우(宋惺牛), 만공(滿空) 송월면(宋月面)등은 근대 우리 지역의 큰 인물들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예산은 선현들의 충과 효(孝)를 덕목으로 살아온 깊은 심신이 베어 있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