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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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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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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기념관은 추사 김정희의 창조 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건립하여 작품을체계적으로 보존·전시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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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묘역05

김정희와 첫째 부인 한산 이씨, 둘째 부인 예안 이씨 세분이 함께 묻힌 합장묘이다. 비문은 1937년 후손 김승렬이 짓고 새겼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경기도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71세에 생을 마쳤다. 죽기 전까지 글씨 쓰기를 계속했는데, 봉은사 경판전을 위한 현판인 판전을 쓴 것이 죽기 사흘전이었다고 한다.

추사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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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예산의 집은 53칸 규모였는데, 1976년에 그중 일부만 복원해 현재 고택의 모습을 갖추었다.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있는 곳이라 김정희는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이곳에 머물렀다.

월성위 김한신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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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부인 화순옹주가 함께 묻힌 묘이다.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은 13세에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총명하여 영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벼슬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귀한 신분임에도 평소에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생활했다고 한다. 묘소 앞 비문에는 영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화순옹주 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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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둘째 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이다. 화순옹주는 13세에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과 결혼했다.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14일을 굶어 남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옹주가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죽었으니 불효라 하여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열녀문을 내렸다.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이다.

급류정 김흥경 묘역(추사 고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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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정 김흥경 묘역(추사 고조부)03

급류정 김흥경은 추사 선생의 고조부로 1699년(숙종 2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주서·정언·부교리·집의·승지·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경종 때 한성부우윤으로 신임사화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로 도승지가 되었고, 영의정에 이른 조선의 문인이다.

천연기념물 백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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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나이는 약 2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두 가지는 죽고 한 가지만 남아있다. 나무껍질은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며, 주변의 어린 백송들과 함께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조선 순조 9년(1809)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화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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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본사 수덕사의 말사이다. 화암사의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삼국시대의 고찰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조선 영조의 부마가 되었을 때 받은 토지에 포함되어 그 이후 집안에 세습되었다. 영조 28년 월성위가 중건하였으나 그 후 대웅전은 소실되고 요사체만 남아 있다. 추사는 이곳에서 불교에 정심하였다. 화암사 뒤편에는 오서산 암벽에 친필 각자한 시경, 천축고선생댁, 소봉래 등 암각유적이 있다.

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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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02
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03
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04
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05

예산군 신암면 화암사 뒤편 경내 바위에 시경, 천축고선생댁, 소봉래 등 암각 된 글씨로써 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51호다, 이는 서예가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이다. 화암사는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재건하고 중수한 것으로 추사 선생 댁과의 인연이 깊은 절이다. 암각문 내용은 좋은 경치라는 시경, 불교와 유교가 어우러진 집이라는 천축고선생댁,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의 집 앞 석순에 쓰인 봉래를 따라 자신은 작은 봉래라 하여 소봉래라는 글씨가 암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