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1786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사조의 구문화 체계를 탈피하여 신 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신문화 전개를 가능하게 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이기도 하다.
1780`s
1786년 1세(정조10년)
6월 3일,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유씨의 큰아들로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남
1790`s
1793년 8세(정조 17년)
이 무렵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 월성위 김한신의 봉사손(奉祀孫)이 됨
1797년 12세(정조 21년)
양부 김노영과 조부 김이주 사망
1800`s
1800년 15세(정조 24년)
한산이씨 이민희의 딸을 아내로 맞음
1801년 16세(순조 1년)
생모 기계유씨의 상을 당함
1805년 20세(순조 5년)
부인 한산이씨의 상을 당함
1808년 23세(순조 8년)
예안이씨 이병헌의 딸을 아내로 맞음
1809년 24세(순조 9년)
10월 28일, 생부 김노경(동지 겸 사은부사)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북경에 감
11월 9일, 생원시 합격
1810`s
1810년 25세(순조 10년)
1월, 북경에서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 고증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음
1816년 31세(순조 16년)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진흥왕순수비임을 고증
『실사구시설 實事求是說』을 짓고,
<이위정기
以威亭記>를 씀
1817년 32세(순조17년)
4월 하순~5월, 보름간 부산과 경주 답사함
6월 8일, 조인영과 진흥왕 순수비 68자를 확인하고 비석
측면에 글자를 새김
1818년 33세(순조 18년)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을 짓고 씀
1819년 34세(순조 19년)
4월 30일, 문과에 급제함
1820`s
1823년 38세(순조 23년)
8월, 규장각 대교가 됨
1826년 41세(순조 26년)
6월 24일,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됨
1827년 42세(순조 27년)
10월, 예조참의가 됨
1828 43세 (순조28년)
병조참의가 됨
1830`s
1830년 45세(순조 30년)
10월 8일, 윤상도 옥사(獄事)로 부친 김노경이 고금도로 유배됨
1833 48세(순조33년)
9월22일, 부친 김노경 유배에서 풀려남
1834년 49세(순조 34년)
『진흥이비고 眞興二碑攷』를 지음
1836년 51세(헌종 2년)
4월, 성균관 대사성이 됨
7월, 병조참판이 됨
1837년 52세(헌종 3년)
3월 30일, 생부 김노경의 상을 당해 청계산 옥녀봉 중턱에 모심
1839년 54세(헌종 5년)
5월 25일, 형조참판이 됨
1840`s
1840년 55세(헌종 6년)
8월 20일, 예산 향저에서 김정희 나포되어 한양으로 압송
9월,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에
위리안치됨
1842 57세(헌종8년)
11월 13일, 두 번째 부인 예안 이씨 사망
1844년 59세(헌종 10년)
여름, 이상적에게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줌
1848년 63세(헌종 14년)
12월 7일, 제주 유배에서 풀려남
1850`s
1851년 66세(철종 2년)
7월 22일, 진종조천론(眞宗祧遷論)으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됨
1852년 67세(철종 3년)
8월 13일, 북청 유배에서 풀려남
1856년 71세(철종 7년)
10월 10일, 과천 과지초당에서 서거
1857년 사후1년(철종 8년)
4~6월, 부친 김노경과 추사 사면, 복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