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메뉴 바로가기

윤봉길의사기념관

모든 군민이 건강한 행복도시 희망 예산 예산 윤봉길의사기념관

유적지 현황 및 안내

윤봉길의사 유적 사진
윤봉길의사 유적 사적229호
  • 지정현황사적 제229호, 1972. 10. 14. 지정
  • 위치시량리199-1사 ~ 산44-2임(135필지)
  • 면적141.007㎡(사적지 54,610 ㎡, 보호구역 86,397 ㎡)
    • · 본전지역(26,660㎡) : 사당, 충의문, 홍살문, 귀빈실, 사적기념비, 어록탑 기념관(관리 사무실)
    • · 성장가지역(11,886㎡) : 동상, 기념탑, 저한당 등
    • · 생가지역(16,064㎡-도중도) : 광현당, 부흥원, 무궁화동산 등

윤봉길 의사는 1908년에 시량리 도중도島中島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고, 성장한 집은 저한당抯韓堂이라 이름하였다. 11세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에 일본인 선생에 불만을 품고 자퇴하였다가 13세에 한문공부를 시작하여 매곡 성주록 선생으로 부터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9세에 신문화 습득과 농촌 부흥에 노력하여 〈농민독본農民讀本〉을 편찬하여 가르치고 월진회를 조직 하였다.

1930년에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집을 떠나 김구 선생이 이끄는 독립운동 조직인 상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일본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한 여러명의 일본인 수괴를 죽이거나 부상을 입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 여러곳에 보여주었다. 의사는 현장에서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19일 일본 삼소정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29호로 지정된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충의사)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기념관, 생가인 광현당과 성장가인 저한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한당 이미지
저한당(抯韓堂)

저한당은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라는 뜻이며,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 의사가 4세였던 1911년에 아버지 윤황을 따라 이사와 살던 집이다. 5남 2녀 가운데 장남인 윤봉길 의사는 동생들과 우애가 남달랐고, 어린 시절 이 집에서 여러 학문을 익혔다. 윤봉길 의사는 1930년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며 민족운동을 꾸준히 펼쳤다. 따라서 1932년에 윤봉길 의사가 순국하고 1945년에 해방이 되던 날까지 저한당은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받았다.
1972년 8월까지 윤봉길 의사의 유족이 이곳에서 살았으며, 10월에 저한당을 비롯한 윤봉길 의사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 낡고 헌 부분을 수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