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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문화관광

사계절 아름다운 천혜의 경관과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고장 예산

제2경 충의사

충의사

민족혼을 깨우는 충의사

위대한 청년, 윤봉길의 정신을 배우다
윤봉길 의사기념관, 충의사, 생가를 돌아보다.

  • 주소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1 충의사
  • 문의예산군관광시설사업소 충의사팀 041-339-8231~8236, 8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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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상세소개

1. 충의사
2. 사당 영정
3.충의사_가을
4. 윤봉길의사기념관_로비
5. 윤봉길의사기념관_전시실04
6. 매헌학당_입구02
7. 기념탑
8. 동상
9. 어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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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의사
2. 사당 영정
3.충의사_가을
4. 윤봉길의사기념관_로비
5. 윤봉길의사기념관_전시실04
6. 매헌학당_입구02
7. 기념탑
8. 동상
9. 어록탑

매헌 윤봉길(1908~1932)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그의 독립정신과 농촌계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윤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인 충의사를 비롯하여, 윤봉길의사 유품이 전시된 기념관, 생가인 광현당, 성장가인 저한당을 돌아볼 수 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도중도에서 윤황 공과 김원상 여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반대해 다음해인 1919년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 오치서숙에서 성주록 선생에게 한학과 시문을 배우며 학문적 소양을 쌓았고, 이때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926년부터는 새로운 문화를 배우는 한편, 농민을 위한 책인 『농민독본』을 집필하며 농촌계몽운동에 힘썼다. 윤봉길 의사는 농촌의 가난과 무지가 민족의 근본 문제라고 생각하고, 농민과 청년을 대상으로 교육과 계몽 활동을 펼쳤다.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생불환(대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 왕의 생일(천장절)과 상하이사변 승리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의거는 한국인의 강한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1932년 5월 25일 ‘살인 및 살인미수, 폭발물 위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 육군형무소를 거쳐 가나자와 육군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가나자와 육군공병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묶인 채 순국하였다.

일제는 윤봉길의사의 시신을 가나자와시 노다야마 육군묘지에 인접한 공동묘지에 매장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실은 안내소에서 감시가 쉬운 공동묘지 통로에 평장하고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예산군 덕산에서 윤봉길선생유골봉환위원회를 발족하였고 다음 해인 1946년 백범 김구의 지시로 일본 가나자와에서 윤봉길의사의 유해 발굴에 착수하였다. 3월 6일 비로소 암장지를 찾아 유해를 발굴하였다. 유해를 수습한 후 조국으로 봉환하여 최초의 국민장을 치뤘으며 윤봉길의사 유해는 1946년 7월 6일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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