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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의 효자

  • 신암면 용궁리에는 강만채 강만구의 효자문이 있다. 강씨 두 형제는 병석에 누우신 어머니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하였으며 몸에 종기가 나면 고름을 입으로 빨아서 짜 주었다고 한다. 또한 어머님의 변을 맛보아 약을 조제하였다고 한다.이러한 지극한 효성을 들은 유생들의 상소로 조정에서 효자문을 내려 그의 효심을 기리며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 자암은 김구 선생의 호이다. 그는 성종 19년에 출생하여 중종2(1507)년에 생원과 진사 두 가지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고상하고 행동이 독실했으며 힘써 학문을 연구하여 중종14년 홍문관 부제학에 재수되고 조광조와 더불어 왕도 정치의 쇄신을 꾀하여 기묘사화(기묘사화)에 연루되었으며 남해로 귀양을 가게되었다. 그가 15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고향인 예산에 돌아오니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다. 그는 원통한 마음에 부모의 산소에 거서 통곡을 하며 산소에 머물렀다. 이때 그가 뿌린 눈물 때문에 산소 근처의 잔디풀이 모두 말라 죽었다고 한다. 그도 이로 인하여 병을 얻어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그의 글씨체는 예술의 경지에 올랐었으며 또한 문장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신암면 종경리에는 자암선생 신도비가 서 있다.

  • 광시면 신흥리에는 김방언 김치화 양세정려문이 있다. 김방언은 1693년에 출행하였으며 그는 효자로서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몸과 마음을 편히해 드렸으며 아버님 병환에는 밤낮 곁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들었다. 병세가 악화되자 허벅다리살을 떼어서 약에다 섞어 달여 드렸고 손가락을 깨물어 자신의 피를 수혈하여 생명을 연장시키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의 아들인 김치화는 그의 아버지인 김방언과 다름없이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부친상을 당하매 3년동안 묘를 떠나지 않고 산소를 돌보며 효성을 다하였다. 후대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계묘(1783)년 양세정려의 명을 내려 양대의 효성을 널리 알렸다.

  • 고덕면 몽곡리에는 김창조의 효자정려문이 있다. 그는 1819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 섬기는 일을 천직으로 알았고 성품이 순수했으며 친구들 사이에도 신뢰감이 두터웠고 도리에 밝았다. 순조 때에 이르러 아버지가 병환이 들자 밤중에 나가 물고기를 구해 드렸다. 이러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어버지의 병환이 완쾌되었다. 그후에는 부모가 병환이 났을때 병의 정도를 알기 위해 변을 찍어 맛을 보았고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가며 효성으로 지극히 간병하여 이를 본 사람들은 요순이 행한 효와 같다며 칭송하였으며 조정에서는 1881년 효자정려문을 하사하여 그 뜻을 널리 알렸다.

  • 고덕면 사리에는 이 규의 효자문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증자(증자)의 양지와 노래자의 위헌을 본받아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며 가난한 가운데도 부모 공양이 극진하더니 어머니가 병들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진혈하여 결국 왼쪽팔이 시들고 다리 하나를 절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조정세서 알고 고종 28(1891)년 그의 효행을 기리며 이곳에 정문을 세웠다.

  • 대흥면 동서리에는 이성만 이순 형제 효제비(효제비)가 있다. 이성만 이순 형제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봄과 가을에는 술과 떡을 하여 부모에게 드리고, 친척들과 기쁘게 나누어 먹었으며 또한 부모가 돌아가시자 형은 아버지의 묘를 지키고 동생은 어머니의 묘를 지켰다. 또한 아침에는 형이 동생의 집을 찾았고 저녁에는 동생이 형의 집을 거서 아침 저녁을 같이 먹었으며 한 그릇의 국이 생겨도 함께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이리하여 지신사(지신사) 하연(하연)의 주청으로 왕이 명하여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자자손손 영원한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 고덕면 상장리에는 이우영 효자문이 있다. 그는 평소에 부모에 공경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지키며 검소하게 생활하던 중 그의 어머니가 병상에 오래도록 누워 계실 때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와 치료를 했다. 또한 어머니가 즐기지 않는 음식을 스스로 삼가는 등 작은 일에서부터 효행을 실천했다. 부친이 병환으로 사경을 헤메자 손가락을 잘라 선혈을 부친에게 드려서 생명을 수 개월 연장 시키기도 했다.또한 동학혁명 기간 중에는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여 상장리에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물러났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광무9(1905)년 효자문을 내려 그의 뜻을 높이 기렸다.

  • 봉산면 봉림리에는 이후직 효자문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였다. 모친이 병환으로 눕자 크게 걱정하여 용한 의원을 찾아가 진료를 부탁하자 모친의 변맛을 보아야 한다고 하니 아무 꺼리낌없이 어머니의 대변 맛을 보고 의원께 상태를 이야기하자 가물치와 더덕이 약이라고 하였다. 엄동설한에 가물치를 잡으려고 냇가로 가 보았으나 얼어 붙은 냇가를 보고는 얼음을 치며 통곡하였다. 이때 얼음이 깨어지며 가물치가 올라왔다. 또한 더덕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자 발밑으로 더덕이 튀어나왔다. 후직은 이것은 하늘이 내게 하사한 것이라 생각하고 정성껏 고아 드렸으며 그 후 어머니는 전과 다름없이 건강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유생들은 후직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송하며 조정에 상소를 올렸으며 광무7(1905)년 효자문을 내려 그의 효심을 높이 기렸다.

  • 덕산면 낙상리는 쌍효각(쌍효각)이 있는데 이는 인영원 부부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효자로 널리 칭송되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지극히 공양하였으며 특히 결혼후에는 부부가 합심하여 지성으로 모셨으며, 모친이 병환으로 위중하자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며, 뒷산에 단을 쌓고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자 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 후에는 부부가 함께 이곳에서 정성으로 지성을 드리니 17년을 더 수하셨다. 이들의 효성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 부부에게 증직이 수여되고 부부쌍효각을 세워 그들의 높은 뜻을 기리도록 하였다.

  • 광시면 미곡리에는 전근금의 효자비가 있다. 전근금은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불사이군)의 신조를 지키기 위해 초야에 묻힌 선비의 후손으로 학식은 높았으나 농사일에 몰두한 농부이자 선비였다. 그는 어버지가 병석에 눕게 되자 정성으로 보살폈지만 그의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죽고 말았다. 전근금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데 대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가 병석에 눕게 되자 뒤따라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똑같은 증세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어머니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하고 고심하던 중 하늘에서 "너의 피가 어머니의 몸에 흐르면 병이 나으리라"는 계시가 들렸다. 그는 기뻐하며 단숨에 달려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어머니께 마시도록하여 단숨에 완쾌케 하였다. 전근금의 이와같은 효성을 높이 사서 조정에서는 마을에 효자비를 세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 신앙면 시왕리에 가면 정확수의 효자문이 있다. 그는 1802년에 출생하여 고종7년에 벼슬에 올랐으며 이후 대사헌까지 지냈다. 그는 부모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했으며 일거수 일투족을 다해 친지에게 존경으로 대하였다. 어버이가 몸져 눕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려 부모님의 수명을 연장토록 하였으며 상을 당한 이후 죽으로 3년간을 연명하여 흰옷을 입고 항상 슬퍼했다. 또한 매일 무덤을 살피고 늙을 때까지 슬퍼함에 작은 게으름도 피우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1870년 충청도 관찰사의 교지에 의해 효자문이 건립되었다.

  • 정해열은 천성이 착해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기는 일에 힘을 다했다. 일곱 살되던 해에 어머님이 병환이 나시자 지성으로 탕을 올리고 잠시도 그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근심하여 하나님께 축원하며 도움을 빌었는데 어느날 어머님께서 잉어와 미나리를 잡숫고 싶어 하셔서 엄동설한에 삽을 들고 얼음을 깨고 미나리를 캐는데 갑자기 잉어 서너마리가 근처 강에서 놀다가 뛰어 나와, 잉어와 미나리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님을 봉양하니 그 성의가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어머님의 병환이 나았다. 해열은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도 어버이의 위엄을 상할까 두려워서 울고 읍하는 것과 슬퍼함을 절도있게 했다. 또한 항상 남의 어려움을 먼저 생각했고 이웃들의 곤란함을 불쌍히 여겼으며 일가 친척간에 처신함은 돈목(敦睦)을 힘써서 하였다. 이같은 덕행과 효도를 행하여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고덕면 상몽리에 그의 효자문이 있다.

  • 봉산면 시동리에 조극선 효자문이 있다. 조극선은 항상 부모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는 효자였다. 부친이 출타하여 집에 올 시간이 되면 항상 지금 비석이 서 있는 곳에 와서 기다렸다가 부친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어느날 부친이 덕산 현감과 함께 늦은 밤까지 담소를 하다가 비가 내리자 너무 늦었고 비도 오니 자고갈 것을 권하였으나 그의 부친은 자식이 밖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기 때문에 가기를 강행하자 현감이 확인해 보자고 따라 나섰다. 현감이 쫓아가 보니 조극선이 그 늦은 밤까지 냇가에서 비를 맞으며 부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감복한 현감이 조정에 이 사실을 아뢰니, 효자정려 문을 세워주게 된 것이다.

  • 신양면 서계양리에는 차명증과 차경증 형제의 효자문이 있다. 차명증은 효성이 천성이었다. 일찍이 어머니께서 해를 거듭하여 병석에 누워 계실 때 온갖 약을 써도 효험이 없게 되자 세번씩 손가락을 잘라 그피를 입에 넣어 드려 생명을 6년이나 연장시켰고 선친께서 병석에 누워 계실 때도 또한 이렇게 하여 양쪽 손가락이 완전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아우인 차경증이 울면서 하는 말이 "형님께서 손가락을 모두 잘랐는데 아우만이 완전한 손가락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형님께서 손가락을 모두 잘라 1개월을 연명하도록 해 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상을 당하여는 산소 곁에 여막을 지었으며, 그가 꿇어 앉았던 곳에는 땅이 오목하게 패이고 산소곁에는 샘물이 솟아올라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 우물을 효자천이라 명명하였으며 지금도 그 우물이 존재하고 있다.

  • 광시면 노전리에는 최승립의 효자정려가 있다. 최승립은 조선 현종 2년에 태어났으며 그는 성품이 착하고 성실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몹시 어려워 봄이면 보릿고개를 넘기느라 품앗이를 다녔다. 가난한 생활에 지쳐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왔으나 별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의원의 말이 어머니의 병환에는 뱀이 좋다는 말을 듣고 그는 업동설한에 뱀을 찾아 나섰지만 허서였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에 겨울산을 헤메이다 이름모를 돌무덤에 쓰러져 그 곳에서 천지신명께 간절한 기도를 올리자 또아리를 튼 뱀이 앞에 있어 이 뱀으로 어머니의 병환이 나았다. 이후 아버지가 병환으로 눕자 잉어가 명약이라는 말을 듣고 또한 엄동설한에 연못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자 얼음이 녹고 잉어가 튀어 올라 이것으로 아버지의 병환도 나았다. 이러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조정에서는 하늘이 내린 효자라 하여 정문을 내리고 그의 효성을 널리 알렸다.

  • 신양면에는 최필현(崔弼賢) 효자문이 있다. 최필현은 조선 숙종때의 사람으로 임진년 2월 20일에 태어났으며 자는 정포(正浦)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편모의 슬하에서자라났다. 편모가 병으로 돌아가시려하자 그는 자식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며 그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편모의 입안에 넣어 드려 편모의 수명을 연장토록 하였다. 편모가 돌아가신 뒤에도 비비람과 추위를 피하지 않고 묘소를 지키며 곡하는 소리가 이경(二更)때 까지 묘소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효자라 불렀으며 을축년 정월에 고종께서 효자정려를 내리고 효자문을 하사하여 그의 효성을 기리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