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번호 | 지정년월일 | 문화재명 | 소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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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82년 8월3일 | 예산산성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무한산성길 |
66 | 87년 12월 28일 | 예산호서은행본점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임성로 |
138 | 97년 12월 23일 | 예산향교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무한산성길 |
164 | 04년 4월 10일 | 예산성당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로 |
지정번호 | 지정년월일 | 문화재명 | 소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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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 84년 5월 7일 | 향천사 천불전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사로 |
174 | 84년 5월 7일 | 향천사 9층석탑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사로 |
179 | 84년 5월 7일 | 향천사 부도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사로 |
180 | 84년 5월 7일 | 간양리당간지주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간양길 |
예산 산성은 예산역전에서 국도선을 온양쪽으로 약 300m 전방에 우뚝솟은 산이 보이며 이 산위에 바로 예산산성이 있다. 본 산성에 오르면 그 옛날 처절했던 격전지인 참상은 찾을 길이 없고 성곽주변은 그 당시 것으로 보이는 기와장만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산성 안을 바라보면 한쪽은 과수원으로 다른 한쪽은 밭으로 변해 있으며 토성 자리는 군데 방공호로만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나라를 사랑하던 우리 민족의 끈질긴 집념과 정 성으로 축성된 예산 산성은 지금도 성고가 약 2m 정도가 되는 곳을 엿볼수 있다. 산성바로 아래로 무한천이 흐르고 있으며 성에서 서쪽으로는 당군을 유도하여 싸움 원벌리(자연복락) 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예산 호서은행은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금융압박을 가해 오면서 1913년 5월 1일 이 지역 민간 지주들이 자본금 30만원으로 설립한 최초의 요지로서 충남 지방의 중요 산물 인 미곡 저포등의 거래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1923년 이곳에 철도가 부설되고 농업창고도 정공장 설립되면서 상업적 농업을 중심으로한 여신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제 금융 압박속에서도 민간 자본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아울러 민족적 긍지를 심어준 금융 단체였다. 그 후 본점은 천안으로 이주하고 현 건물만 존재하고 있다.
확실한 건축년도 및 유래는 문헌상 보존된 곳이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조선중엽에 건축 되 었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대제를 지내고 있음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 각 지방에 설립 되었던 관립 교육기관이다 예산 향교는 조선조 태종 13년 (1413)에 창건 되었다고 전해지며 조선조 말 순조 9년(1809) 에 대대적인 重修(중수)를 거쳤다 근래에 서재를 중수하였다. 구릉지를 2단으로 정리한 다음 앞쪽에는 명륜당을 두고 뒤로 이어지면서 동서재가 U자형으 로 배치되며 그 뒤에 내 삼문이 있고 대성전 앞에 배치된 前學後廟(전학후묘)식 배치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전면 1칸 열은 뒷칸이며 공포는 외1출목 2翼工(익공) 형식 이다 가구는 1高柱(고주) 5樑架(량집) 구조에 정면만 겹처마로 된 맛매지붕이다.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내부는 벽을 두지않는 통칸에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가구는 無高柱(무고주) 5량집 구조이고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현 천불전은 창건당시 이 곳에서 세웠다는 일설과 다른곳에서 옮겨 왔다는 일설이 있고 당초에는 3053불을 모셨다하나 현재는 1515불이 보존 되고 있으며 미혼자의 결혼 대상자 인물을 점쳤다는 전설도 있음.
羅漢殿 (나한전) 앞에 세워져 있으며 백제 의자왕 12년 의각 스님 좌우에 석탑이 세워졌다고 전해오나 임진왜란으로 건물과 석탑이 전소되어 초창당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으나 현재의 9층 석탑은 초창당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
감운 스님 부도 조선말엽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함( 향천사 창건주) 멸운 스님이 출정한 사이에 왜놈들이 사찰에 불을 질러 전소된 것을 이분이 나한전을 지어 중창한 사찰임. 백제 의자왕 12년 의상(창건주)스님 부도.
연도는 알 수 없으나 과거에 이 곳에 조그만 절 (사찰)이 있었다고하여 현재도 절터라고 불리어 지어 간양리 당간 지주는 현재의 국기게양대와 같이 이 지방에 큰 행사가 있을 시는 이 곳에 기를 게양했다고 함 대원군 시대에 안동 김씨 묘지관계로 싸움 끝에 재판하여 패하면서 절이 망했다 함. 전설에 의하면 (탁봉절주지)질마재라는 재가 절마재에서 망한후 현 마곡사로 옮겼다는 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