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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화천리(花川里)

화천리는 본래 예산군 술곡면의 지역으로서 시냇가에 꽃이 많이 있었으므로 꽃 거리 또는 화천(花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독리, 입석리, 웅동을 병합하여 화천리라 하고 대술면에 편입되었다. 화천리가 국가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호구 총수』이다. 이에 따르면 화천리는 이웃한 산정리, 마전리, 이티리, 내술리 등과 함께 술곡면을 구성하는 19개 리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편찬되는 『여지도서』에는 술곡면에 16개 리가 적시되어 있으나 화천리가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다른 동리에 포함되었거나 누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토성의 입향시기를 고려하면 화천1리는 적어도 17세기 중엽 이전에 형성된 마을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농리(農里)

농리는 면 소재지 화천리의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면 소재지에서 2,3분이면 닿을 곳이다. 남쪽으로는 화천과 경계하고 북쪽으로는 상항리와 경계를 한다. 동쪽으로는 유구와 경계를 하고 있다. 본래는 대술면 술곡리 지역 농소리였는데,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농소리와 비곤리, 외돈리를 합하여 농리로 통폐합하면서 농리가 되었다.

상항리(上項里)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함에 따라 내항리, 외항리, 석평리 대곡리와 술곡면의 괴리(乖離) 일부를 병합하여 상항리라 했고 대술면에 편입 되었다. 상항리는 솟때배기, 도름말, 녹촌, 대뱅이, 구억말, 새터, 절골로 편성(編成)되어 있고 행전 부락 단위는 4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상항리는 녹촌과 가운데말(중뜸) 솟대배기(아래갈막)가 중심이 되어서 마을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리고 동리가 형성되고 있는 지형이 목(目-項)자처럼 되었다고 해서 그 지명이 유래되고 있다.

방산리(方山里)

방산리(方山里)는 산간지대(山間地帶)이고 오지(奧地) 마을에 속한다. 청동기(靑銅器) 유물이 인접해 있는 궐곡(厥谷)리인 은행정의 밭에서 10여 년 전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이 지대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 옛날에는 수렵 등 채집을 위주로 그 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미루어 보인다. 방산리(方山里)는 예산 현 대지동면(大支東面)의 천방산 하록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방산동(方山洞) 또는 방산골 그리고 한적한 골이라고 해서 한 곡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 거주하는 한산 이 씨(韓山李氏)를 한곡(閒谷) 또는 한갓 골 李 氏라고 도 한다.

장복리(長福里)

장복1리는 조선시대 때 대지동면(大枝洞面)에 속했던 마을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지금 장복1리인 비동(碑洞), 저평리(楮坪里), 국화동(菊花洞)과 2리인 위수동(渭水洞), 중봉리(中峰里), 웅동(熊洞), 장복동(長福洞)을 병합하여 장복동의 이름을 따라 장복리라 칭하고 대지동면과 술곡면을 병합한 대술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75년 시행된 행정구역 분리에 따라 장복1리와 2리로 분구되었는데, 이때 장복실(원장복), 위수동, 중봉리, 웅동 등이 장복2리로 분리되었다. 따라서 현재 장복1리는 국화동을 중심으로 저평리(당나무들), 비동(거먹비, 과골)로 이뤄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4년 통합과정에서 장복동의 명칭을 따서 장복리라 칭한 것이나 『여지도서』와 『호구총수』의 기록에서 보듯이 장복동이 다른 자연마을에 견주어 비교적 비중 있게 기록된 것 등을 볼 때 1914년 이전에는 장복동이 다른 마을에 비해 마을세가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1975년 분구될 때는 국화동을 중심으로 한 장복1리의 마을세가 더 커져 장복동이 2리로 되었다. 장복1리가 커진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그중 산업적 측면을 볼 때 1926년부터 시작된 양잠업의 발달과 1970년대 저수지 축조, 경지정리를 통한 경지면적 증가 등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송석리(松石里)

송석리(松石里)는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숯골[炭洞里], 돌무덤[石積里], 화정리(花亭里), 백제울[白寺洞里]의 4개 자연 마을을 합하여 소나무[松]와 돌[石]이 많은 곳을 의미하는 ‘송석리(松石里)’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4개의 자연 마을은 그대로 1반에서부터 4반까지 편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송석리는 1959년(단기 4292)까지는 1구와 2구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1959년에 1구와 2구를 통합하여 하나의 송석리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화산리(花山里)

화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망실[망곡], 곰우리[고물리], 묵지(墨池), 능미(陵未), 도봉골 등 5개의 자연 마을을 합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화산(花山)’이라는 명칭은 사방에 진달래꽃이 많이 피었으므로 붙여졌다고도 하며, 화산천을 중심으로 마을이 꽃잎 모양으로 형성되어 붙여졌다고 전한다. 화산리의 자연 마을이 조선시대 자료에 맨 처음 나타나는 곳은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수록된 묵지리(墨池里) 한 곳이다. 『여지도서』에 나타난 묵지리는 예산현으로부터 13리 지점에 있고, 32호에 남자 51명, 여자 45명이었다. 현재의 화산리 범위에 마을 명칭이 묵지리 하나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묵지리 이외의 다른 마을이 모두 묵지리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묵지리의 명칭이 현재의 화산리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칭한다고 볼 수 있다.

궐곡리(蕨谷里)

대술면의 소재지인 화천리에서 아산 도고면으로 이어지는 616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3.5km 남짓 올라가면 고색창연한 은행나무의 기상이 돋보이는 으능정이 마을이 나오고, 여기에서 좌측으로 난 소로를 따라 500m 가량 떨어진 골짜기에 고새울이 자리한다. 궐곡1리의 중심을 이루는 고새울은 고사리가 많이 자생하므로 ‘고사리울’, 변하여 고새울 또는 한자로 궐동(蕨洞)이라 하였다. 실제 산간마을인 고새울 주변에는 ‘고사리밭’으로 불릴 정도로 예전에는 고사리가 지천으로 나서 봄철이 되면 뭇 아낙네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고새울은 조선시대 예산군 대지동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리, 마산리, 다촌, 삼거리, 부경동과 술곡면의 괴리 일부를 병합하여 궐곡리라 하고 대술면에 편입되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18세기 중엽의 고새울은 관문에서 동쪽으로 13리에 위치했으며 궐동리(蕨洞里)로 기록되었다.

시산리(詩山里)

시산리는 시루미 고개를 경계로 예산읍과 맞다있어 초등학교 학군을 예산으로 편입하고 있을 정도로 가깝다. 남으로는 시산 2 리와 경계를 이루고, 동으로는 궐곡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락산을 주산으로 전불과 절골, 홈통골이라는 작은 골짜기를 중심으로 마을을 이룰 정도로 산골 마을이다. 들이라고는 벌뜰이라고 하여 이 마을에서 제일 넓은 뜰인데 논 경작지로 경작지를 모두 합해야 일만오천여 평 밖에 안 되는 뜰과 지금은 배나무 과수원으로 바뀐 일만여평의 솔모루 뜰이 전부이다. 시산리는 1914년 행정통폐합이 있기 전에는 술곡면 증곡이었다. 증곡은 시산 1,2구를 합한 이름이다. 읍지, 여지도서에 의하면1750년경 37호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화천리(花川里)

화천리는 본래 예산군 술곡면의 지역으로서 시냇가에 꽃이 많이 있었으므로 꽃거리 또는 화천(花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독리, 입석리, 웅동을 병합하여 화천리라 하고 대술면에 편입되었다. 화천리가 국가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호구총수』이다. 이에 따르면 화천리는 이웃한 산정리, 마전리, 이티리, 내술리 등과 함께 술곡면을 구성하는 19개리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편찬되는 『여지도서』에는 술곡면에 16개리가 적시되어 있으나 화천리가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다른 동리에 포함되었거나 누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토성의 입향시기를 고려하면 화천1리는 적어도 17세기 중엽 이전에 형성된 마을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산정리(山亭里)

산정리는 본래 산직집이 있었으므로 산직말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산정말이 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요동, 죽곡, 신리를 병합하여 산정리라 하였다. 현재 산정리는 32번 국도와 함봉산 기슭에 북쪽으로부터 요골[속칭 육골], 대실, 황새부리, 당골, 그리고 32번 국도 건너편에 있는 작은 선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마을의 명칭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선후기인 1756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이다. 이 책에 산정리와 관련된 몇 개의 마을 명칭이 술곡면조(述谷面條)에서 명칭이 확인된다. 즉 산정리(山亭里), 죽곡리(竹谷里), 신리(新里)의 명칭을 볼 수 있다. 산정리는 예산읍에서 술곡면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하므로, 인구의 왕래가 잦았던 교통상의 요지였다. 산정리 164번지에는 대술면으로 통합되기 이전 술곡면의 면사무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은 구토지대장에 명치 45년(1912년) 당시 국가 소유로 되어 있다는 증거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마전리(麻田里)

마전리는 본래 예산군 술곡면(述谷面)의 지역으로 예전부터 삼밭이 많아 삼바실 또는 마전(麻田)이라 하였고, 1959년 지명조사에 의하면 마전1리 상삼은 옛날, 세 집씩 있는 마을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 세집 지은 모양이 성(城)을 쌓은 것 같다하여 삼성리라 칭했으며, 중삼은 나란히 있는 세 마을 중에 가운데 있다하여 중삼이라 하였고, 삼베실은 조선 선조 때 사색당파 싸움에 피난한 세 사람이 와서 새로 마을을 이뤘다 하여 신삼리(新三里)라 칭하였고, 후에 마을 사람들이 삼베실에서 생산하는 삼을 지도상에 기록토록 요구하여 삼베실이라 하였다 한다. 또는 이때 살았던 세 집의 성시가 각각 유씨/박씨/강씨로 알려진 세 성씨가 많이 살아 삼성리라 불렸다고도 한다. 1914년에 이루어진 행정구역의 통폐합으로 인한 개편으로 상삼리, 하삼리, 신삼리, 무성리, 수조리 일부와 공주군 신상면 산북리를 병합한 후 마전리라 하여 대술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마전1리에 속한 자연마을은 가장 깊숙이 자리한 삼바실과 윗말을 비롯하여, 상삼, 중삼 등이며 이중 상삼이 마전1리의 중심마을이다.

이티리(梨峙里)

대술면의 소재지인 화천리에서 서쪽으로 1km 남짓 내려가면 왼쪽에 강민첨장군의 묘소로 이어지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3km 가량 거슬러 올라가면 이티1리를 구성하는 자연마을이 도로변에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티1리는 본래 예산군 술곡면의 지역으로서 숲이 많아 숲실 또는 술곡이라 하였다. 조선후기 면리제의 실시와 더불어 술곡의 이름을 따서 술곡면이라 하고 그 소재지가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우명리, 당리, 외이리, 내술리, 외술리, 화대리를 아울러서 이티리라 하고 대술면에 편입되었다. 이티리는 천방산과 극정봉 기슭의 골짜기에 형성된 산촌(散村)이다. 즉 두 개의 봉우리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는 서쪽으로 점점 고도를 낮추면서 긴 협곡을 이루는데, 그 골이 시작되는 소거리/당거리/배티마을에서 발원한 이티천의 물줄기가 동출서입(東出西入)하여 이티리와 마전리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달천(화산천)에 합수된다. 이티1리를 구성하는 자연마을은 바로 이티천 주변의 협곡을 거슬러 홧대울-과녕말-숲실-말뚝배-고모리-지엉골 등이 띄엄띄엄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