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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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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읍내리(邑內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으며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의 현내면 지역으로서 덕산군청이 있어 읍내라 하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성내리, 동문리, 서문리, 평리, 신리 각 일부와 대조지면의 송산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읍내리라 하였다. 행정구역 1,2,3리로 되어있으며 930세대 2,062명이 거주하고 있다.

북문리(北門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협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의 현내면 지역으로써 덕산 읍성의 북문이 있어 북문리라 하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동문리 일부와 내야 68세대 162명이 거주하고 있다.

옥계리(玉溪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협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의 현내면 지역으로써 이곳 시냇물이 옥같이 맑으므로 옥계라 하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서문리 증가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옥계리라 하였다. 223세대 444명이 거주하고 있다.

상가리(上伽里)

백제때는 금물현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이산군의 영현인 금무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가야골 위쪽에 있으므로 위가야골, 위 개골, 또는 상가동, 상가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중가리 일부와 사점리를 병합하여 상가리라 하였다.93세대 182명이 거주하고 있다.

사동리(社洞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사직단이 있었으므로 사직골 또는 사직동 또는 사동이라 하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교동, 여은리를 병합하여 사동리라 하였다. 125세대 212명이 거주하고 있다.

신평리(新坪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의 현내면 지역으로써 덕산현에 사직단이 있었으므로 사직골 또는 사직동 또는 사동이라 하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에 원리, 신리, 조양리, 평리, 서문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리와 평리의 이름을 따서 신평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은 1,2리로 되어 있으며 552세대 950명이 거주하고 있다.

시량리(枾梁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 현내면의 지역인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궁평리, 신동과 노곡리, 조량리, 소시동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소시와 조량의 이름을 따서 시량리라 하엿다. 행정구역 1,2,3리로 되어 있으며 375세대 782명이 거주하고 있다.

둔리(屯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의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 현내면 지역으로써 지지풀이가 많아 지산 또는 둔지미, 둔지산이라 하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구정리, 궁리, 노곡리, 조량리 각 1부를 병합하여 둔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은 1,2리로 되어 있으며 198세대 425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치리(大峙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다가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 현내면의 구역으로써 큰고개 아래로 한티, 한티골이라 불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중치리, 삼승리, 낙동, 신티리, 소시촌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치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은 1,2리로 되어 있으며 147세대 281명이 거주하고 있다.

광천리(廣川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고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 나박소면의 지역으로써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조교촌, 광돌리, 사천리 일부와 현내면의 대티리 일부를 병합하여 광돌과 사천의 이름을 따서 광천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은 1,2리로 되어 있으며 129세대 228명이 거주하고 있다.

사천리(斜川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고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 나박소면의 지역으로써 사천가가 되므로 사천이라 하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사천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은 1,2리로 되어 있으며 157세대 424명이 거주하고 있다.

외라리(外羅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고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 나박소면의 지역으로써 나박소 바깥쪽이 되므로 밖나박소 또는 외나박소라 하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점촌, 외나리, 사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외라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은 1,2리로 되어 있으며 53세대 97명이 거주하고 있다.

내라리(內羅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고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 나박소면의 지역으로써 고려때 있었던 내박소의 안쪽이 되므로 안나박소 또는 내리, 내나박소라 하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신동, 송애촌, 복당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라리라 하였다. 42세대 103명이 거주하고 있다.

복당리(福堂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다가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 나박소면의 지역으로써 복을 비는 신당이 있었으므로 복당 또는 복댕이라 하였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평리일부와 홍주군 고남하도면의 구성동, 운성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예산군 덕산면에 편입 복당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은 1,2리로 되어있으며 111세대 242명이 거주하고 있다.

낙상리(樂上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다가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 나박소면의 지역인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탄리, 낙천리와 홍주군 고남하도면의 갈오리, 원성리의 각 일부와 홍천면 중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낙천과 상천의 이름을 따서 낙상리라 하여 예산군 억산면에 편입했다. 행정구역은 1,2리로 되어있으며 77세대 155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동리(大洞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다가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 나박소면의 지역으로써 큰마을이라 하여 대동이라 했는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거천리, 낙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동리라 하였다. 75세대 158명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