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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새로운 내일, 하나된 예산! 대흥면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입니다.

대흥면 행정복지센터 이미지

대흥의 역사는 신석기말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 일부씨족들이 해수와 육수가 넘나드는 기름진 땅 대흥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뒤이은 시대인 청동기 시대에는 북방문화권에 속하는 스키토 시베리언 계통의 부족중 일부가 이주하여 집단 거주지를 이루었다. 근거로서 동서리 뒷산 사방공사시 청동검 9점,점파형동검 3점, 마제석총등 다수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된바 있다.

백제의 모태인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지침국중 일부로서 지심현이라 지칭하였는데, 당시부터 임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뜻이 님이 계신곳이라 풀이 되므로 부족장이 거처했던 곳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대흥면이 역사기록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백제말기 부터이다. 서기 60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퇴패하던중 3만여명의 백제군이 임존성에 입성 항거하였으며 사비성 함락후에도 의자왕의 조카 복신과 승려도침 그리고 장군 흑치상지등이 임존성과 주류성을 근거로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여 한때 200여성을 회복하는등 그 위세를 떨쳤으나 내분과 나·당연합군(신라:김유신,당:유인궤)의 공격으로 백제부흥의 희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백제멸망후 당의 야욕에 의하여 백제의 고토에는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었는데 그중 일부로서 예산에는 마진현,덕산에는 이문현,대흥에는 지심현을 두었던 것으로보아 당시 대흥이 군사행정의 요충지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후 신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당까지 추방하여 삼국을 통일한 다음 당과 발해를 견제하기 위하여 요새를 북방으로 옮기면서 대흥은 급격히 쇄퇴하게 된다. 그후 대흥은 전형적인 고을 형태를 유지해오다 고려 명종2년 감무라는 관아를 두어 통치하였으며 고려 말기에는 예산현,덕산현,대흥현(대흥,광시,신양,응봉지역)을 설치하고 현 대흥면사무소옆에 동헌을 짓고 현감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대흥은 홍주(홍성)목의 소속으로 있다가 태종13년 다시 대흥현이라 지칭하고 숙종때에 이르러 대흥군으로 승격, 당시 예산현,덕산현보다 상위직의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이렇듯 한반도 역사의 요충지였던 대흥은 일제초기(1914. 3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흥현,예산현,덕산현을 통합한 예산군에 편입되어 면에 속하게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1964년12월 예당저수지가 축조되면서 현 지세를 이루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작은 농촌 마을의 형태를 이루는 면소재지로서 관광지로서의 발돋음을 하고 있으며, 고대의 찬라했던 문화는 봉수산을 중심으로 임존성, 이성만형제효제비, 대원군척화비, 태실과 태비, 옛관리들의 선정비등 곳곳에 많은 유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