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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자은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당(時堂), 과파(果坡), 노과(老果) 기타 많다. 본은 경주, 정조 10년 신암면 용궁리에서 출생, 판서 노경(魯敬)의 아들. 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우도 암행어사, 대사성,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실학자로서 경학(經學), 사학(史學), 시문(詩文), 금석(金石), 고고(考古), 서화(書畵) 등 각 분야에 뛰어났다. 특히 서예는 동방 제일로 추사체(秋史體)를 창시하였으며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도 발견 해독하였다. 고택이 신암면 용궁리에 있고 학예술비가 세우졌으며, 고택에 영정(影幀)을 보존하고 있다.

화순옹주(和順翁主)

영주의 옹주,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본 경주)의 아내, 정렬로 정려를 세웠음. 묘는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남편을 여의고 9일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절사하였다.

강만채(康萬采), 강만구(康萬龜)

신암 용궁리 사람으로 본은 신천(信川). 식(植이)의 아들로 이조 숙종때 강만채·강만구형제가 어머님이 병환에 있자 손가락을 깨어 주혈하여 어머니가 3년 연명. 명정(命旌) 정문이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김갑

본은 광산(光山). 자암(自庵) 구(絿)의 손자로 이조 선조때 임진왜란중의 탁월한 효행으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증직받았고 왕명으로 정려가 신암면 종경리에 있다.

이존창

천주교인으로 내포지역선교(內浦地域宣敎)에 공(功을) 크게 세워 신암면 신종리에 있는 그 집터를 성지로 가꾸고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