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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씨부인

노씨부인 소개

  • 노씨부인은 오원면 녹야리(오촌2리)에서 광산김씨우영(宇英 1610~1673)의 장남으로 1661년에 태어난 만진(萬珍 1661~1743)의 부인이다. 노씨부인은 본관이 광주(光州)이란 사실과 관련한 구술이야기만이 전해오고 있으며 그밖의 자료는 사료부족으로 밝혀진 내용이 없다. 광산 김씨 시조는 김흥광(金興光)이며 신라 신무왕의 세째 아들이다. 그는 장차 국난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현재의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살았다.
  • 시조로부터 25세손이며 조선중기문인이자 회인현감을 지낸 김명남(金命男 1554~1618)의 동생 계문(季文)이 대흥군수로 부임하여 오가 오촌리에 정착하면서 300백년 동안 대를 이어오고 있다. 경상도관찰사를 엮임한 용계 김지남(金止男)이 숙증조이며 인제현감을 지낸 김선(金羨)이 조부이다. 또한, 조선초기 인수체로 3대명필가인 자암 김구, 사계 김장생, 김집, 김만기, 김진규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대유현이 모두 광산 김씨이다. 용이 아홉번 굽이쳐 흐르는 형국에 터를 잡았던 노씨부인의 99칸 대가는 20여년전에 헐어 없어져 안타깝다.
  • 신암 용산까지 넓은 토지와 지금은 사라졌지만 마을입구에 홍문까지 세웠을 정도로 큰 권세와 향촌의 유풍을 이끌었던 명문양반사족 가문이었다.

노씨부인 업적

  • 국사당보를 만들어 식량의 창고 뜰인 오가평야에 농사용 대 수로를 건설하여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켰다.
  • 노씨부인은 질곡의 땅, 오가평야를 생명의 젖줄로 탈바꿈시킨 위대한 조선의 여인이다.
  • 오가평야의 물부족이란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농업혁명의 신기원을 만들어낸 노씨부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00년 부터 국사봉 아래 노씨부인 사당을 건립하여 매년 농사시업 전에 관청 관계자와 오가농민이 참석하여 제를 지냈다. 현재 지내고 있는 예당저수지 '통수식'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 노씨부인 제향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 정책에도 굳굳히 이어오다가 1963년도 예당저수지 수리시설이 완공되자 국사당보의 기능은 사라졌으며 당시 건립된 수로는 일부 용수간선으로 개축 이용되고 노씨부인 사당도 폐사되었다.

윤희두

  • 오가 출신으로 본은 파평. 부친 윤종렬과 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1896년 3월 22일 태어났다. 그의 본적은 오가면 양막리 199-2 번지이며 당진 송악에서 태어나 어려서 양막리로 이사온 것으로 전해진다. 1946년 경주인 이춘심의 녀 이장화와 결혼했다.
  • 3.1 운동 당시 마을 이장을 보며 도랑뎅이산에서 4월 초에 마을 주민 전체와 인근 지역민이 참여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모든 책임을 자신이 주도한 것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태형을 받고 나왔다.
  • 일제강점기 국권을 상실해 강압과 착취는 심하고 농민들은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받을 때 좌방리 임명호 선생이 설립한 등대교회에서 민족의 구원과 피압박에서 벗어날 새로운 희망과 역할을 터득하고 동리 사람 심태섭, 오간선씨와 협의하여 1928년 3월 28일 양막리 산 59번지에 양막교회를 설립하였다.
  • 민족독립을 위해선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했던 선생은 우선 지역에 학교나 교육시설이 없어 안타깝게 여겨 1930년 예배당에 강습소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펼쳤다. 1947년 예산읍 외 지역 최초로 양막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중등교육기관으로 교육의 문호를 확대 개방하였다. 배움의 기회와 열기가 고조되면서 몰려드는 학생을 수용하기 힘들게 되자, 1949년에 일본인 적산토지였던 분천리 56번지 일대를 매입하여 마름네 빈창고를 뜯어다가 짓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행 교실 5칸을 지어 배움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는 현재 임성중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걸어다니며 훌륭한 선생을 찾아 다녔다는 선생은 민족교육의 산파 역할을 했으며 몸소 실천한 위대한 교육의 선구자였다.